조선 근대화 ‘지켜보던’ 공간에서, 한국 미술 도약 ‘지켜보는’ 공간으로

월간조선
​하주희 기자

지난 100여 년간 그다지 변하지 않은 거리가 서울에 있다면 믿을 수 있을까. 그것도 도심에 말이다.서울 중구 정동에 있는 덕수궁길이 그곳이다. 덕수궁 길을 걸어가다 보면 덕수초등학교가 있고 그 옆에 옛 구세군 중앙회관이 있다. 지금은 정동 1928아트센터가 건물의 공식 명칭이다. 옛 구세군 중앙회관(이하 중앙회관) 뒤쪽엔 주한 영국 대사관과 대한성공회 서울주교좌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중앙회관, 주한 영국 대사관, 성공회 성당까지 모두 100여 년 전부터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건물들이다. (중략)

치외법권 지대였던 정동
구세군이 조선에 상륙한 건 1908년이다. 그해 로버트 호가드 정령(사관의 상위 계급 중 하나)과 그의 부인 애니 존스(Annie Johns) 사관이 한국에 파견됐다. 구세군은 조선에서도 역시 빈민 구제 등 자선사업에 힘을 쏟았다. 1928년 자선냄비 모금을 시작했다.
1926년 구세군 2대 대장인 브람웰 부스(Bramwell Booth,윌리엄 부스의 아들)가 조선을 방문했다. 그의 일흔 살 생일을 기념해 모은 의연금으로 정동에 사관학교를 짓기 시작했다. 1926년에 설계, 1927년에 착공하고 1928년에 완공했다. 건축비는 7만원. 현재 가치로는 얼마일까. 1930년대를 기준으로 경성(서울)의 집 한 채가 대략 1,000원이었다고 하니 엄청난 금액이다.
구세군은 사관학교, 지금의 중앙회관을 왜 정동에 지었을까. 원래 그곳은 경운궁(덕수궁) 선원전이 있던 궁궐지였다. 고종 황제가 1919년 승하한 이후 경운궁 선원전 영역은 제 모습을 잃어버렸다. 대지는 '창덕궁 이왕직'의 소유였다. 이왕직은 일제가 대한제국 황실을 이왕으로 격하하며 만든 기관이다. 대한제국 황실 사람들과 황실 재산을 관리하던 일본 궁내성 산하 기관이다. 1915년 대정친목회로 소유권이 넘어갔다. 이왕직 소유의 정동 1-23번지와 대정친목회 소유의 봉래동 4정목 237번지를 교환하는 거래였다. 1927년 구세군이 매입했다.
구세군 본영은 신문로에 있었다. 정동 땅을 매입한 이유는 뭘까. 당시 정동 일대는 치외법권 지대였다. 영국, 미국, 러시아의 공간들이 들어서 있었다. 특히 정동 1-23번지는 성공회 대성당, 영국 대사관과 삼각형 모양을 이루며 서로 붙어있다. 그 일대가 일종의 영국인 마을이었던 셈이다. (중략)

구세군 중앙회관 건물 디자인의 원형인 영국 클랩튼 홀. 사진=구세군 국제 헤리티지 센터

신고전주의 양식
중앙회관은 건립 당시부터 구세군의 신학교인 사관학교 건물로 이용됐다. 1959년 증축 후 건물에 구세군 대한본영 일부가 입주하면서 구세군 중앙회관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기 시작했다. 구세군 사관학교는 과천 캠퍼스를 신축해 1985년 이전했다. 현재 학교의 명칭은 구세군사관대학원대학교다.
중앙회관은 준공 당시 경성의 주요 서양식 건물로 손꼽혔다. 복잡한 장식이 없는 단순한 벽돌조 외관이 단정하고 당당한 인상을 준다. 2층 건물인데, 가운데에 중앙 현관이 있고 좌우 양쪽에 대칭으로 각각 현관이 자리하고 있다.
영국 런던에 있는 클랩튼 콘그레스홀(Clapton Congress Hall)을 축소해놓은 모양이다. 클랩튼 콘그레스홀은 런던에서 역시 구세군 사관학교로 쓰인 건물이다. (중략)
외관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 포르티코(Portico)다. 포르티코는 주랑 형태로 된 현관을 뜻한다.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을 생각하면 된다. 고대 그리스 건축에서 시작됐다. 중앙 현관을 통해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면 4개의 기둥이 있는 포르티코를 통과해야 한다. 신고전주의 양식의 특징 중 하나다.
최두남 서울대 건축학과 명예교수는 포르티코를 서양 복식의 턱시도와 비교했다.
"턱시도를 입는 것만으로도 예식에 참여하는 느낌을 낼 수 있듯 건물에 포르티코를 배치하는 것만으로도 엄숙하고 종교적인 느낌을 낼 수 있다."
쓸데없이 왜 기둥을 세웠을까 의문을 품을 수 있지만 어떻게 보면 경제적인 양식이다. 현관에 포르티코를 배치하면 건물의 다른 부분에 별도의 장식을 배치하지 않아도 된다.

1세대 화랑의 귀환
김양수 두손갤러리 대표는 한국의 1세대 갤러리스트다. 1969년 서울대 서양화과에 다니며 고미술상을 시작했다. 1970년대부터 현대미술 전시를 기획했다. 1984년에 서울 동숭동에 두손갤러리를 열었다.
중앙회관이 서양의 근대 건축을 조선 사회에 들여왔듯 두손은 1세대 화랑으로 외국의 최신 현대미술을 화단에 소개했다.
1989년 당대 최고의 갤러리스트였던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 1907~1999)의 기획으로 [5 Great American Artist(위대한 미국작가 5인)] 전시를 열었다. 로이 리히텐슈타인, 로버트 라우셴버그, 앤디 워홀, 제임스 로젠퀴스트, 프랭크 스텔라 등 그야말고 '전설'이 된 예술가들을 한국에 소개했는데, 그때는 반응이 대단치 않았다고 한다. 국내에서는 작품 판매가 저조했다고 회고했다. 아트페어 프리즈 서울에서 몇십억원짜리 그림이 완판되는 요즘은 그야말로 격세지감이다.
한국 근현대 미술의 거장들을 세계에 알리는 역할도 했다.
김환기, 이중섭, 박수근, 백남준의 작품 세계를 알리고, 오늘날 한국 미술의 거장이 된 박서보, 정창섭, 곽인식, 심문섭, 전광영, 이수경 등의 작가들을 후원했다.

김 대표는 가구, 건축업에까지 사업을 넓혔다. 그 끝은 사업부도, 결국 도미(渡美)했다.
"가진 돈을 다 털어서 뉴욕행 비행기 표를 사서 떠났지요."
뉴욕에서 그는 기적처럼 다시 일어났다. 화랑을 하며 갈고닦은 선구안의 힘을 빌렸다. 사실 중앙회관 건물 얘기와는 크게 관련은 없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얘기라 그의 뉴욕 일화를 소개하면 이렇다.


고물 의자로 부활
뉴욕에 빈손으로 정착한 김 대표는 오카다 겐조(일본계 미국화가)의 작품을 구해 일본 지인의 도움으로 판매했다. 그 돈을 종잣돈으로 에스프레소 바를 열었다. 그 당시만 해도 변두리 동네였던 소호에 200평짜리 공간을 구했다. 그의 본업이었던 갤러리 공간도 한쪽에 함께 꾸미고 싶었다. 월세 두세 달 치인 보증금은 해결했는데, 문제는 내부를 꾸밀 가구였다.
"대리석을 산 다음 차이나타운에서 쇠다리를 사서 붙여 테이블을 만들었어요. 의자는 전에 투자해놓은 한국 회사에서 보내주기로 했어요. 언제 오나 기다리고 있는데, 회사가 자본 잠식이 됐다며 5만 달러를 보내달라는 겁니다. 어떡할까 하다 트럭을 가지고 허먼 밀러(Herman Miller) 의자 공장 부근에 있는 고물상에 갔어요. 부서진 건 고쳐달라고 하면서 개당 20달러 쯤에 임스 체어와 조지 넬슨 의자를 합쳐서 100여 개를 샀어요."
허먼 밀러는 명품 의자 브랜드다. 허먼 밀러에서 만드는 임스 체어와 조지 넬슨 의자는 단순하고 경쾌한 디자인에 노랑, 빨강, 초록 등 원색이 특징이다.
쇠다리를 붙여 만든 대리석 테이블에 고물상에서 사 온 알록달록 총천연색 의자들을 들여놓고 에스프레소 바 '언리미티드(Unlimited)'를 열었다. 많이 팔려야 하루 매상 300달러. 그러던 게 하루 아침에 사정이 달라졌다. 《뉴욕타임스》 주말판에 소호에서 가봐야할 곳으로 소개됐다. 하루 6,000달러로 매상이 뛰었다.
아침이면 오프라 윈프리 팀이 와서 회의를 하고, 구석에선 영화감독 우디 앨런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어요. 그 옆에선 순이가 왔다갔다 하고요. 클린턴 대통령이 오기도 했어요. 스스로 주문하고 자리가 없어 서서 커피를 마시고 나갔어요."

백남준이 김양수 대표를 모델 삼아 만든 작품 "Mr.Kim". 브루클린 뮤지엄에 기증되었다. 사진=두손갤러리

문화재 건물에 갤러리 열어

김 대표는 뉴욕에서 백남준과 깊은 인연을 맺게 된다. 백남준이 일반인을 모델로 작품을 만든 건 딱 한 번인데, 바로 "Mr.Kim"이다. 그 미스터 김이 바로 김 대표다. 김 대표는 그 작품을 뉴욕 브루클린 뮤지엄(Brooklyn Museum)에 기증했다.

12년 간의 뉴욕 생활을 정리하고 그는 서울로 돌아왔다. 한국 문화가 세계 중심으로 다가간 이 시점에, 예술의 본질이 무엇인지 고국에서 되짚어보고 싶었다. 중앙회관에 갤러리를 열기 위해 3년을 기다렸단다.
"이 건물이 5년 후면 완공 100주년을 맞아요. 문화재라서 건물에 일절 손을 댈 수 없어요. 가벽만 겨우 설치했지요. 100년 전 한국에 근대를 전해준 이 건물처럼 한국 문화의 또 다른 개화기를 이끌고 지켜보자 생각했어요."
대화를 나누다보니 천장에서 삐걱대는 소리가 들렸다. 2층에서 누군가 걸으면 바닥이 삐걱거린다. 박서보 작가는 이 소리를 두고 인스타그램에 이렇게 표현했다.
'위층에서 삐그덕삐그덕 나무 복도를 걷는 소리가 난다. 유서 깊은 공간이 무척 아름다운 갤러리다.'

2층으로 올라갔다. 사실 중앙회관의 백미는 2층에 숨겨져 있다. 바로 강당이다. 강당에 서서 위를 올려다보면 아름다운 트러스가 보인다. 화려하진 않지만 기품있는 곡선이 보인다. 트러스는 천장 부분의 차중을 지지하는 삼각형 형태의 구조물이다. 트러스 중에서도 삼각형의 밑변이 없는 해머빔 트러스(Hammer Beam Truss)다.
사실 이 구조물은 건축 당시엔 없었다. 1959년 증축 이후 설치됐다. 눈길을 끄는 건 트러스가 화려한 고딕 양식이라는 점이다. 고딕 양식의 성당이라면, 프랑스의 노트르담 대성당, 독일의 쾰른 성당을 떠올리면 된다. (중략)

백남준 M200


2층 강당에 숨어있는 또 하나의 보물은 바로 백남준의 작품 M200이다. M200은 모차르트 사망 200주년을 맞아 1991년 제작됐다. 86개의 TV 모니터를 보고 있으면, 모차르트를 모티브로 한 영화 속 장면과 존 케이지, 머스 커닝햄, 요제프 보이스 등 백남준이 교류했던 예술계 거장들이 등장한다. M200이 마치 그 공간을 위해 제작한 것처럼 잘 어울린다. 그 공간만큼은 오롯이 백남준을 기리는 백남준 예배당이다.

김 대표에게 돌아봤을 때 가장 아쉬운 작가가 있는지 물었다. '역시 백남준'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한국인은 자기 비하를 하는 경향이 있어요. 걸출한 작가가 한 명 탄생해야 그 나라의 문화가 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에겐 백남준이 있어요. 백남준은 거장입니다. 작품 가격이 비싸서가 아니에요. 그는 패러다임을 만들었습니다. 중국은 중화사상을 내세우며 작품 가격을 올려놨지만 딱히 내세울 세계적인 현대미술 작가가 없어요. 그러니 공자를 찾으며 과거로 회귀하지요."

백남준을 좋아하는 이들 사이엔 '백남준이 일본이었다면 사후 위상이 지금 같진 않았을 것'이라는 말이 나온다. 전국 공공기관 건물에서 이따금 마주치는 백남준의 작품은 거의 꺼져있거나 일부가 고장난 채로 방치되어 있다. 백남준을 기리기 위해 만들었다는 백남준아트센터는 과거 절전을 한다며 2층 전시장 전원을 내리기도 했다. 정말 심각한 문제는 백남준이라는 이름이 서서히 잊히고 있다는 점이다. 심은록 미술평론가의 말이다.

"한국에서 백남준 같은 작가를 다시 만나려면 몇 세기를 기다려야 할지도 모릅니다. 전 세계 미술계에서 백남준이 위대한 사람이라는 걸 다 알아요. 백남준 1주기 전시를 프랑스 퐁피두센터에서 나서서 열었어요. 그런데 고국인 한국에서 밀어주지 않으니 점점 잊히는 거죠. 너무나 훌륭한 작가니까 그나마 지금까지 명성이 살아남은 겁니다." (중략)


관람객들 중 20대들이 눈에 띈다. 갤러리마다 2030들이 정말 눈에 많이 띈다. 언젠가부터 일반화된 현상이다. '라떼'는 남자 대학생 셋이 모이면 당구장이나 PC방이었는데 요즘은 갤러리에서 남대생 서너 명이 모여 진지하게 그림을 감상하는 광경을 흔히 마주친다. 흥미로운 광경이다. 이런 조류가 10년쯤 후, 그러니까 백남준 탄생 100주년이 되는 2032년엔 어떤 모습으로 변해있을까.

중앙회관 건물을 나섰다. 공간에도 운명이 있을까. 조선의 근대화를 지켜보던 공간이 지금은 한국 미술의 도약과 백남준의 작품을 지키는 공간이 되었다.


글_월간조선 [공간탐험] 정동 1928아트센터(옛 구세군 중앙회관), 하주희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