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환, 획과 그려지지 않는 여백 그리고 무한

세계 미술시장으로의 관점

“ I open wide my eyes but see no scenery. I fix my gaze upon my heart.”
“나는 눈을 크게 떴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나의 시선을 마음에 두기로 한다.” [1]

이우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것을 기억해야 한다. 보이는 것만 보아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의 작품 앞에서 눈을 크게 떠도 마음의 눈을 뜨지 않는다면, 보이는 것은 없을 것이다. 관계지향적인 사고, 마음의 눈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한 이우환의 작품은 그저 점이고 선에 지나지 않는다.

이우환의 그림은 지극히 문인화적인 것이며, 남종화적인 사조를 이해하지 않고, 단순히 생성과 소멸을 보이는 점과 선의 변주만을 보아서는 그의 작품이 주는 아우라를 체험할 수 없다.

그의 점과 선은 바람에서 흔들리다 다시 비어 있음이 극명해지는 점(조응)으로 간다. 엄격하게 그리고 일관되게 그는 조형요소를 극도로 제한하고 그것을 일구어 왔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이 지속되듯이 그는 그 자신의 예술적 규범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획과 그려지지 않는 여백으로 그가 관계지향적인 작품을 계속하는 것은 많은 작가들이 자신의 내부로 침투하는 동안 그는 자아 그 너머를 작품에 표현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의 여정을 살펴보자.

선으로부터, 1978, oil on canvas, 100 x 80 cm (40)

The artist has written, ‘load the brush and draw a line. At the beginning it will appear dark and thick, then it will get gradually thinner and finally disapper… A line must have a beginning and an end. Space appears within the passage of time, and when the process of creating space comes to an end, time also vanishes.’
‘붓을 들고 선을 그린다. 처음에는 선이 어둡고 두껍게 나타나지만, 점차 얇아지고 결국에는 사라진다… 하나의 선은 반드시 시작과 끝이 있어야 한다. 공간은 시간 속에서 나타나고, 공간을 생성하는 과정이 끝날 때, 시간 역시 사라진다.’

With winds, 1978, oil on canvas, 72.5 x 91 cm (30)

The ‘From Winds’ series was begun in the early 1980s. Lee Ufan later extended the series into a related group of works called ‘With winds’.
‘바람으로부터’ 시리즈는 1980년대 초부터 시작된다. 이우환은 이후에 관련된 작품들은 ‘바람과 함께’ 시리즈로 확장한다.

관계항 Relatum, 2000 ; 조응 Correspondance, 2006
조응 Correspondance, 2003, oil and pigments on canvas 130 x 162 cm Dialogue, 2006, oil and pigments on canvas 100 x 81 cm

이 모든 평면회화작업 시리즈를 이해하기 위해, 붓의 터치가 어떤 마음의 상태에서 생성되고 만들어 진 후에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획’이 지닌 의미와 그려지지 않는 부분 여백을 이해해야 한다.

이우환의 획은 무한한 순간 속에 정지한 듯 고요한 중에 움직이는 것 같은 정중동(靜中動), 살아 있는 운동감(생동감), 기(氣)가 흐른다. 그것은 작가 자신의 붓을 다루는 숙련된 힘이기도 하거니와 그림에서 일 획이 지닌 무게를 그가 알고 행하기 때문이기도 한다. 획은 우주적 개념에 맞닿아 그림에서는 생명을 주는 것이다.
굳이 이우환이 아니더라도 점 하나, 선 하나에는 화가의 일생이 담기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획은 단순히 획이 아니라, 화가에게는 인생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조응에서 힘 있는 점 하나가 그려지지 않는 여백과 어울려 감응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것, 선 하나만이 그려진 백자에서 힘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것은 획이 그저 그려진 게 아니기 때문이다. 획은 부단한 노력 없이 얻어질 수 있는 게 아니다.

“모든 그림은 마음을 이해하는 데서 온다. 그런데 만일 화가가 내면의 이치를 이해하지 못하고, 산수의 섬세한 다양성과 인물이나, 새와 동물과 초목의 성정 혹은 못이나 누각, 탑의 크기를 아는 데 실패한다면 그것은 한 획의 넓은 규범을 파악하지 못 했기 때문이다. 첫 발을 디딤으로 멀리 가고 높이 오르는 것 같이, 이 한 획은 그 자체에 우주와 그 너머(바깥)를 내포한다. 수많은 획과 먹도, 누군가 파악하고 취하기를 기대하면서, (한 획에서) 시작해서 한 획에서 끝난다. 사람은 한 획 속에 분명한 자신의 생각과 투명한 칠치로 우주를 보여줄 줄 알아야 한다. 만일 그의 팔목이 완전히 반응하지 않으면 그림은 좋지 않다. 그림이 좋지 않다면, 그것은 팔목이 반응하는 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선회하는 동작과 구부림으로 생동감과 윤기를, 그리고 멈추는 동작으로 넓이를 주라. 뻗어나가고 끌어들이고, 둥글 수도 모날 수도, 곧을 수도 굽어질 수도 있고 상하로 좌우로 균형 잡을 수도 있다. 그래서 마치 무의 중력과 불길의 타오름 같이 자연스럽게 애써 강요하지 않고 갑자기 솟아나고 들어가고, 끊어지고 옆으로 기운다. 이와 같이 모든 내면에 파고들며, 모든 표현에 형태를 주고, 법에서 떠나지 않고 모든 것에 생명을 준다. 한번 휘갈김으로 산천, 인물, 조수, 초목, 못과 정자, 누각은 그 형세를 갖춘다. 그와 관련된 경치와 감정은 감춰지거나 드러난다. 사람들은 어떻게 그와 같은 그림이 이루어지는가를 보지 못한다. 그러나 그리는 행위는 마음의 이해에서 결코 멀리 떨어져 있지 않다.” [2]

획은 마음에서부터 나오며 이는 우주를 보여줄 만큼 확장된다. 문인화적 맥락에 맞닿은 획의 개념이 이우환에게서 변형을 거친다. 획은 형태를 표현하고, 감정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이우환의 획은 그런 지시적인 획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과거의 획이 지닌 개념을 포용하지 않으면 이우환의 획은 역사적 토대가 사라지고 맥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지시적인 획이 아니라, 획 자체가 주인공이 되는 순간을 만들었다. 형태나 감정의 메타포가 되는 획이 아니라, 그 자체에 의미가 부여될 수 있는 획인 것이다. 그것이 가능해지고 생명력이 부여될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바로 비어 있음, 그려지지 않는 부분, 여백인 것이다. 그런 획과 그려지지 않는 부분 여백이 관계를 맺음으로 그림은 시간의 무한한 순간 또는 공간 속에서 멈춘 듯 움직이고 끝난 듯 다시 숨결을 이어가는 시적이며 철학적인 것으로 변모되는 것이다.


주석
[1] 무라카미 다카시, 2008
[2] 석도의 일획론(一劃論)

글_이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