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mien Hirst – New Religion

“나는 왜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갖지 않은 채, 약은 완전히 믿으면서 예술에 대해서는 그렇지 않는지 이해할 수 없다.”
- 데미안 허스트 -

<New Religion(SKY) 2005, Silkscreen on Somerset satin 140 gsm 200 x 200 cm Edition of 55. Signed and numbered.>

데미안 허스트가 이러한 발언을 하게 된 동기를 해석하지 않으면 “New Religion”은 이해될 수 없다. 거대한 질문들로부터 “New Religion”은 시작된다. “New Religion”은 신을 향한 절대적 믿음을 잃은 많은 동시대인들에게 존재와 죽음과 구원의 문제가 그 안에 얽혀있는 작품이기 때문이다. 인생이 고통의 바다라는 관점을 전제로 한다면, 신은 그러한 고통을 완전하게 해결해 주는 역할을 해왔다. 적어도 과학이 인간의 삶에 오늘날처럼 깊숙이 침투하기 전까지는 말이다. 그러나 토마스 하디의 [신의 장례식][1]이라는 시에서처럼 신이 죽어 장례식을 치른 상황이라면 문제는 복잡해진다. 그래서 의지하게 되는 과학이 해줄 수 있는 것은 고작 몇 알의 알약이 제공하는 것이 전부이다. 약은 인간에게 삶을 연장해줄 수 있는 도구는 되지만, 죽음의 문제에는 해답을 줄 수가 없다. 삶에서 사용되는 약은 죽음 그 이후에는 소용없는 도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동시대인들의 삶이 복잡해진다. 누군가는 신을 믿고, 누군가는 약에 의존한다. 삶과 죽음 앞에 홀로 선 자신의 어둠을 제거하기 위해서 각자는 다른 길을 택한다. 그러나 이것도 부족한 면이 있다. 인간이 단 하나의 도그마를 믿고 의지하는 충실한 존재로 남기에는 세상은 너무도 많이 변모해왔고, 인간은 의심 많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종교도 과학도 완전한 답이 될 수 없다. 이 상황에서, 간과해왔던 예술의 치유 능력에 대해 언급하면서 데미안 허스트는 예술도 종교와 과학이 그러하듯이 사람들을 돕고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예술이 사람들을 치유한다는 전제가 없이, 예술에 대한 다소 맹신적인 믿음 없이는 예술은 이해될 수 없기 때문이다. 예술을 향한 믿음, 예술을 향한 사랑 없이는 예술은 이해될 수 없다. 그러한 맥락에서 그는 종교와 과학과 예술을 자신의 작품 속에서 섞이게 한다. 그리고 예배당에 십자가가 있듯이, 갤러리에 자신의 작품이 존재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믿음',‘사랑' 없이는 고통이 치유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리석어 보일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현실이며, 고통을 제거하는 방법은 신을 향한 사랑이든, 약을 향한 사랑이든, 예술을 향한 사랑이든 믿음이 깔린 사랑인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랑을 통해 인간이 자신에게 스스로 질문함으로써 고통을 벗어나는 데 조력하고자 하는 게 데미안 허스트에게 있는 것이다. 그가 비록 자극적이고 충격적인 시각적 내용을 담아낸다해도 역사 속의 어느 예술가처럼 그가 만드는 작품은 보편적인 질문 앞에 선 인간에게 위로가 될 무언가를 제공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예술을 통해 그 이상할 수 있는 것은 실상 없다.

Butterfly Painting 1점과 조각 4점, 실크스크린 프린트 44점으로 이뤄진 “New Religion”은 데미안 허스트가 그간 작업해왔던 작품들을 요약하여 하나의 박스에 넣은 작품이기도 하여, “New Religion”의 이해를 위해서는 데미안 허스트의 중요한 작품들을 훑어보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

[살아 있는 자의 마음 속에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으로 각인된 데미안 허스트는 [A Thousand Years]에서는 삶과 죽음의 마이크로 생태계를, [격리된 어머니와 아이]에서는 분리가 가져오는 단절감과 고립감과 외로움을, Butterfly Painting에서는 나비의 생의 사이클을 통해 피할 수 없는 죽음이라는 운명 앞에 선 인간의 현실을 자각하게 함으로써, 거대한 질문들을 직면하게 하는 힘있고 굵직한 시각적 표현을 해왔다.

[살아 있는 자의 마음 속에 죽음의 물리적 불가능성]에서 영혼이 없는 사체를 포름알데히드 용액 속에 담음으로 인해, 죽었지만 보존된 물리적 사체가 죽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지 않지만, 죽음의 상태를 여과 없이 보임으로써 직면할 인간의 조건을 보이듯이 그는 끊임없이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을 시각화하는 것에 예술적 의지를 보여왔다. “New Religion”에서도 죽음의 상태는 ‘The Fate of man(인간의 운명)’과 ‘The Skull Beneath the Skin(피부 아래 해골)’에서 죽음이 경과한 상태인 해골로 직설적으로 표현되었으며, 나아가 이 두 작품은 전시도록의 처음과 끝을 차지한다.

하지만 데미안 허스트가 죽음을 시각화하는 것이 단지 죽음을 노래하기 위한 것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죽은 소가 피를 흘리고 내동댕이 쳐진 상황에서 파리(새로운 생명)가 태어나고, 이 새로운 생명체는 죽은 사체를 섭취하여 생을 잇고, 또다시 감전으로 인해 죽어가는 일련의 마이크로 생태계를 재현시킨 [A Thousand Years]는 단순히 죽음을 노래하고 있지 않다. 유리 안의 마이크로 생태계는 삶과 죽음의 장중한 진혼곡을 보여주고 들려주고 있는 것이다. 모순처럼 보이지만 죽음을 통해 생을 얻는 생태계의 비정한 현실을, 그리고 우리도 다만 그것의 일부라는 것을 제시함으로써, 죽음을 위한 죽음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삶과 죽음이 공존하는 세계를 압축적이며, 시적으로 제시하여 깊은 공명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세계 현대 미술사에서 우리의 전통 기법을 현대화하여 세계의 공감을 얻은 두 가지 유형 - 관념을 서사적(narrative)으로 시각화한 이우환과, 관념을 서정적(lyrical)으로 표현한 전광영의 작품 - 을 볼 수 있다.

앞으로, 세계의 미술시장은 동양적 추상표현주의를 정립한 전광영의 작품을 통해 생생하고 오묘한 빛과 색의 아름다움에 열광하리라 확신한다. 세계 미술시장에서의 꾸준한 수요는 희소성과 작품성에 대한 평가에 기반하여 세계적 작가로서의 잠재성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한 증거일 것이다. 작가가 자신의 문화에 깊은 뿌리를 두면서 국제적으로 설득력 있는 미술 언어를 사용하는가를 평가의 주요 기준으로 삼는 세계 미술시장에서 전광영은 김환기의 다음 세대로서, 이우환과 함께 한국미술의 맥락을 잇는 대표적 작가가 될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살아있는 자들의 마음 속에 불가능한 인식들을 넘어선 세계를 향한 그의 인식에는 문학적 은유가 내포되어 또 다른 의미에서의 아름다움을 연출하고 있다. 예컨대 피부 아래 해골 즉 인간의 죽음은 가혹하고 불편한 죽음일 수 있지만, 나비의 죽음에는 분명 부인할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다. 죽어가는 것들에는 분명 닿을 수 없는 아름다움이 있고, 유독 데미안 허스트는 이러한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있다. 그에게 죽음은 삶만큼 중요한 무엇이며, 삶은 어두운 일면인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상태에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상태를 견뎌낼 무언가를 찾아야 한다면, 그것이 어디에서일 것인가? 삶과 죽음이라는 것 사이에 인간이 풀어야할 거대한 질문들의 답은 어디에 있을까? 답은 없고, 질문만이 가득하다면, 삶에서 중요한 것들에서 위안을, 의지할 곳을 찾아야할 것이다. 그가 생각하는 인간의 삶에 중요한 네 가지는 종교, 사랑, 예술 그리고 과학이며, 그래서 “New Religion” 프로젝트는 그 네 가지를 함께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이해를 위해서 프로젝트의 작품들을 이렇게 단순화시켜 정리할 수도 있다.

‘The Fate of man(인간의 운명)’이라는 타이틀의 해골은 인간이 맞이할 죽음을 상징하고, 이러한 운명 앞에서 ‘The Soul on Jacob’s Ladder(야곱의 사다리의 영혼)’에서의 나비는 갈망이며, 야곱의 사다리이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춤추는 듯한 가냘프지만 강인한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경계를 넘어선 희망 같은 존재이며, ‘The Eucharist(성찬)’에서 성찬은 예수의 피와 살이기보다는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해줄 약이며, ‘The Apostles(12사도)’ 역시 예수와 열두 제자가 아니라, 갖가지 진통제이며, ‘The Wounds of Christ (예수의 상처)’에서 상처는 실제 사진의 가공에 지나지 않고, 수술대에 오른 병자의 상처로 대체되기도 하며, ‘New Religion(새로운 종교)’은 약이 나열된 배경 위로 성경의 텍스트들이 다른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The Holy Trinity (성 삼위일체)’에서 그래프는 성삼위로 표현되고, ‘The Sacred Heart (신성한 심장)’에서 예수의 심장은 가시면류관으로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는 전 세계 핵보유 가능국들을 최후의 만찬을 한 예수와 열 두 제자로 바꾸고, ‘The Stattions of the Cross (14 처소)’에서 예수의 고난의 길은 다시 약과 성경의 텍스트로 혼합되고, ‘The Crucifix (십자가)’에는 십자가에는 알약들이 알알이 박히게 되며, ‘The Skull Beneath the Skin (피부 아래 해골)’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인간의 운명인 죽음을 이야기 한다.

“New Religion”은 예수의 고난과 상처, 구원의 역사(종교)가 약(과학)으로 대체되고 동시에 성경의 텍스트가 원래의 종교적 메시지를 전달하고 동시에 죽음에 대한 테마를 버리지 않고 있어, 풍부한 의미를 파생시키는 프로젝트이다. 서로가 서로를 방해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감을 두고 있어 단일한 의미로는 축약할 수 없기에, 해석하고자 하는 의지를 좌절시키지만 이것이 매혹적인 부분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서 보이는 것은 단순하지만, 그 안에는 풍부한 의미의 그물망을 엮어낼 수 있는 힘이 있다. 설명할 수 없는 것과 설명할 수 있는 것이 뒤섞이고, 해석할 수 있는 것과 해석할 수 없는 것이 함께 공존함으로써, 작품의 보편적인 내용에 대한 개인적 경험이 투사될 수 있기 때문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자신의 생각을 이해시키려는 것이 아니라, 작품을 통해 우리 자신을 이해하길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의 삶 속에 어둠을 밝혀줄 거대한 것들, 종교·과학·예술을 통해서 말이다. 신을 믿듯, 약을 믿듯, 예술을 믿고 사랑하면, 예술이 당신의 마음 속에 이해될 수 있고, 이 이해는 기쁨을 동반하기에 당신의 고통을 제거해 줄 수 도 있다고 속삭이는 것이다. 완전하지도 않고, 잠시가 될지라도 인간에게는 여러 가지의 고통의 진정제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New Religion”은 어디선가 와서 어디론가 가고 있는 그 사이, 고통이 도처에 도사리고 있는 삶의 자리에 있는 우리에게 의지할 무언가로서 우리 앞에 있는 것이다. 데미안 허스트는 종교와 과학 말고도 예술이라는 아름다운 무언가에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이고 있다.

‘The Fate of man (인간의 운명)’이라는 타이틀의 해골은 인간이 맞이할 죽음을 상징하고, 이러한 운명 앞에서 ‘The Soul on Jacob’s Ladder (야곱의 사다리의 영혼)’에서의 나비는 갈망이며, 야곱의 사다리이며, 삶과 죽음 사이에서 춤추는 듯한 가냘프지만 강인한 영혼을 지닌 존재이며, 경계를 넘어선 희망 같은 존재이며, ‘The Eucharist (성찬)’에서 성찬은 예수의 피와 살이기보다는 사람들의 고통을 제거해줄 약이며, ‘The Apostles (12사도)’ 역시 예수와 열두 제자가 아니라, 갖가지 진통제이며, ‘The Wounds of Christ (예수의 상처)’에서 상처는 실제 사진의 가공에 지나지 않고, 수술대에 오른 병자의 상처로 대체되기도 하며, ‘New Religion (새로운 종교)’은 약이 나열된 배경 위로 성경의 텍스트들이 다른 방식으로 배열되어 있으며, ‘The Holy Trinity (성삼위일체)’에서 그래프는 성삼위로 표현되고, ‘The Sacred Heart (신성한 심장)에서 예수의 심장은 가시면류관으로 이중의 고통을 당하고 있으며, ‘The Last Supper (최후의 만찬)’는 전세계 핵보유 가능국들을 최후의 만찬을 한 예수와 열 두 제자로 바꾸고, ‘The Stattions of the Cross (14 처소)’에서 예수의 고난의 길은 다시 약과 성경의 텍스트로 혼합되고, ‘The Crucifix (십자가)’에는 알약들이 알알이 박히게 되며, ‘The Skull Beneath the Skin (피부 아래 해골)’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인간의 운명인 죽음을 이야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