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오늘의 삶과 조우하는 청자의 새로운 영혼

디자인, 오늘의 삶과 조우하는 청자의 새로운 영혼
(국제대학 해강도자미술관 재개관 기념 강연회의 의의)

새로운 도자 전통이 형성될 수 있도록 시각적 체험적 문화를 융화하려는 노력이 절실히 요청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도예가들에게, 디자인이라는 테마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하는 이유는 '우리가 오늘날 겪고 있는 혼란의 대부분은 어제의 도구와 개념으로 오늘의 작업을 하려는 의도와 결과입니다', 라고 한 마셜 맥루언의 말처럼 오늘의 도예가가 겪는 혼란을 정리하는 데 도움이 되고자 함에 있습니다.

숨을 멈추고 바라보아야 할 정도로 아름다운 고려 청자의 전통은 많은 도예가들이 자신을 전적으로 전통에 맡기고 전통의 힘에 의지해도 좋을 만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통의 힘에 대해 조금이라도 의심을 품는다면 도예가들의 작업은 지루한 반복에 지나지 않게 됩니다. 이 지루한 반복이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는 고통스러울 정도로 지루할 수 있다는 점에서 문제가 발생합니다. 여기에서 시작되는 과거와 현재의 미의식의 균열은 전통의 고수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과연 적합한 방식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제기합니다.
전통의 힘이 우리의 시각을 그대로 움켜쥐고 전통의 재현만으로도 위대한 것이라는 인식이 깨뜨려 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디자인에 대해, 오늘의 삶과 조우하는 청자의 새로운 영혼이라는 맥락에서의 디자인에 대해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이 강연회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디자인은 바로 이 균열의 간극, 과거와 현재, 생활과 문화, 실용과 순수한 아름다움의 요구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는 매개로서의 디자인입니다. 많은 도예가가 실용과 예술적 심미성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으며, 과거에 얽매인 동시에 현대화 시키는데 어려움을 겪으며, 삶 속으로 청자를 끌어안을 수 있도록 생활 속에 문화 속에 어떻게 녹여야 할지를 모르고 있습니다. 그 극단 사이에서 도예가는 각자 독자적으로 외로운 길을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청자를 디자인적 사고로 바라보게 되면 이 딜레마는 해결될 수 있는 부분이 분명 있습니다.

사물은 욕망을 담고 있습니다. 기존의 청자를 만드는 도예가들이 제작자의 욕망에 방향을 맞추어왔다면, 이제 사용자의 욕망에 방향을 맞춰야 한다는 맥락에서 디자인이 얘기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패러다임의 변화입니다. 산업사회가 되면서 많은 이들이 대량생산 체제의 사물에 익숙하게 되어 개성 없는 사물들이 당연하다는 풍조가 만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주변을 돌아보십시오. 이제는 자신만의 취향을 반영하는 사물들을 향해 눈을 돌리고 있습니다. 모든 이를 만족시킬 디자인이라는 것은 의미가 없습니다. 청자를 쓰려는 이들의 취향을 만족시키는 디자인이면 충분합니다. 그래서 청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도자 디자인을 하면 문제는 쉽게 해결될 것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이것이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도예가가 곧 탁월한 디자이너가 되어야 하는 셈이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이러한 아픈 진통이 없이는 청자가 다시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하는 문화로 거듭날 수 없기 때문에 다른 마인드, 디자인적 사고를 강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차이를 만들어야 합니다. 디자인은 차이를 만드는 것이며,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로부터 차이는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도예가에게 요청되는 것은 보지 못했던 것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익숙한 것을 미지의 것으로 재발견할 수 있도록 하는 감성을 불러일으키는 것입니다. 필립 스탁(Philippe Starck)이라는 유명한 디자이너가 세계적으로 사랑 받는 '레몬즙 짜개 (Juicy Salif)'를 디자인할 때 했던 생각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한 번은 레스토랑에서 오징어 모양의 레몬즙 짜는 기구를 만들면 어떨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중략) 그 진짜 목적은 수천 개의 레몬을 짜는 것이 아니라 막 결혼한 신랑에게 장모와의 이야깃거리를 제공하는 것이다." 필립 스탁

이처럼 우리 도예가들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쓰는 사람이 느낄 감성에 마음을 쓰는 것입니다. 감성이 전달되지 않는 디자인은 의미가 없습니다. 색을 통해서든 형태를 통해서든 촉감을 통해서든 도자는 마음을 전달해야 합니다. 필립 스탁이 디자인한 레몬즙 짜개는 레몬즙을 짜는데 실용적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랑받습니다.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소비를 하도록 이끄는 것은 물질적인 것에 있지 않습니다. 비물질적인 것에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물을 사려는 것은 경험을 소비하기 위한 것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보여줄 수 있는 사물이 사랑받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것은 물건 자체가 아니라 사물이 가진 아우라에 있기 때문입니다.

디자인이 오늘의 삶과 조우하는 청자의 새로운 영혼이 되지 않는다면, 디자인이라는 새로운 영혼이 없는 청자는 물질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전통을 지닌 청자이더라도 아름답거나 혹은 불편하거나,라는 범주에서 어정쩡하게 부유하게 될 것입니다.

청자를 만드는 이가 디자인해야 하는 것은 이렇듯 물질적인 것이 아닌 비물질적인 것입니다. 디자인은 배려입니다. 사용자가 도자를 만지는 손길에서 느끼는 촉감의 체험과 도자를 보는 시각적 체험, 도자를 쓰고 씻을 때의 경험까지도 사려깊게 배려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지향해야 할 도자 디자인입니다. 결국 모든 것은 인간을 향해 있어야 합니다. 사용자를 사랑하는 마음이 없다면, 아름다운 기형일지라도 소유하고플 정도로 마음을 끄는 도자는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디자인적 사고라는 것은 어려운 이야기가 아닙니다. 바로 기본에 충실하는 것에 있습니다. 사람을 사랑하는 것에서 비로소 청자가 새로운 영혼을 갖게 되어 다시 사람에게 사랑 받는 사물이 될 수 있습니다. 사용자가 만지고 보는 데서 행복감을 가질 수 있는 청자를 만드는 것은 결코 특별한 이론적 토대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마음으로 청자를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합니다. 사람과 청자를 연결시킬 수 있는 디자인은 사람과 청자에 대한 깊은 애정에서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 애정이 청자에 적용되어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레몬을 잘 짤 수 있는 기구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레몬을 짜는 기구를 보면서 얘기를 나눌 수 있을 만한 디자인을 해야 한다는 필립 스탁의 이야기를 기억해야 합니다. 청자가 우리 문화의 정체성을 말해주는 기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해서는 감성이 본질임을 알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다완이라는 가상의 세계로 깊게 빠져들어갈수록, 다완이라는 현실 세계의 기물 그 자체가 더 중요해진다는 것입니다. 디자인이라는 청자의 새로운 영혼으로 청자의 감성을 다시 불러 일으킬 때, 청자가 중요해질 것입니다.

“우리는 합리적인 세계가 우리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환상을 세상이 다시 만들어내는 듯 보이는 시대를 살고 있다”고 한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말을 끝으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청자가 지닌 색과 부피감, 형태감, 미적 감수성이 다시 새로운 환영을 불러일으키는 시대를 만들어 나갈 수 있도록 새로운 청자 디자인을 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108 agonies', designed by Alessandro Mendini, Produced by Haegang Institute of Go ryeo Celadon '백팔번뇌', 알레산드로 멘디니 디자인(108 개가 모여 한 작품임), 해강고려 청자연구소 제작, 해강고려청자 연구소에서 '108번뇌'를 소성하는 과정을 찍은 사진, 국제 대학 해강도자미술관 재개관 전시 '번역된 도자, 그 다섯 가지 이야기'에 전시될 '108 agonies’>

이를 위해 도자 디자인에 대한 인식의 전환과 방법론에 도움이 되고자, 도예가들에게 과거를 재해석하는(전통에 기반한) 디자인이 지닌 힘을 피력하는 동시에 예술의 세계화를 주제로 강연을 구성하여 오늘의 삶과 조우하는 청자의 새로운 영혼으로서의 디자인 사고의 전환의 기회를 마련하고자 강연회를 개최합니다.

청자는 아름답습니다. 그것을 새로운 청자 디자인을 통해 오늘의 사람들에게도 공감을 얻게 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_글 이지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