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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소용의 '공간과 인간'들이 만들어낸 ‘이스트빌리지 미술’ 정신 내 예술의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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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히말라야,한국을  오가며 유목적 삶 살아온 최동열 작가...소용은 무소용에서 나와

29일까지 열리는 인터아트채널 전시서  당시 함께했던 이스트빌리지 작가 작품도 선보여  

 

10여년전 그를 만난 것은 경기도 이천에서다. 지인의 집을 빌려 그는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리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히말라야로 떠났다. 얼마후 그가 대구에 작업실을 마련해 작업을 한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서울 동묘 근처에 작업실을 얻었다는 사실은 최신 소식이다. 언제나 처럼 아마도 떠도는 삶 속에 잠시 머물고 있는 것일게다. 화가 최동열(69)을 그렇게 다시 마주하게 됐다. 긴 여로를 끝낸 여행자의 모습일까. 아니라면 영원한 보헤미안 같은 방랑자일까. 그를 만날때마다 늘 자문하게 된다.

 

처음 그를 만났을때 그가 들려주었던 이력들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갔다. 문학 지망생이었던 그는 수재들의 코스였던 경기중학에 입성을 하게 된다. 규격화된 성공코스에 떠밀려진 것이다. 하지만 경기고 진학에 실패하면서 그는 ‘사회의 규격’에서 벗어나게 된다. 검정고시를 거쳐 15세 나이로 한국외대 베트남어과에 입학했지만 1년 반 만에 그만두고 해병대에 자원,베트남전에 첩보대원으로 참전했다. 새로움과 삶의 과정을 스스로 만들어 가기위한 여정의 시작이었다.

 

해병 첩보부대(HID)에 근무하면서 그는 전쟁의 비인간성을 몸으로 읽는다.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미국으로 옮겨졌다. 뉴저지 주립대 생활도 1년을 넘기지 못했다. 조숙한 그에게 대학은 어리기만 했다. 클럽의 기도, 술집 웨이터, 공장 일 등이 그의 배움터가 됐다. 22살짜리 미국 유학생은 유도와 태권도 사범까지 하며 강단있게 지내며 술과 마약에 빠져보기도 했다. 이런 경험들은 고스란히 글과 통찰의 결과물이 됐다. 자서전 ‘들개와 선임하사’를 중보한 ‘돌아온 회전 목마’와 미학을 논한 ‘아름다움은 왜’라는 책들이 생산물들이다.

 

 

글쓰기에 대한 열망은 더욱 타올랐다. 영화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를 보고 배경이 됐던 미국 남부의 뉴올리언스의 풍광에 매료된 그는 무작정 그곳으로 떠났다. 1977년 뉴올리언스에서 회가인 지금의 아내 엘디(L.D.로렌스)를 만나게 된다. 재즈의 고장인 뉴올리언스는 문학적 영감을 얻기 위해 찾아간 한국청년에게 오히려 화필을 들게 만든 인연이 됐다.
 

최동열은 30대 때인 1980년대 중반 뉴욕 이스트빌리지에서 첫 개인전을 열어 미국 화단에서 이름을 올렸다. 당시 이스트빌리지는 마약과 범죄로 퇴락해 가는 동네였다. 하지만 임차료가 저렴하고 빈 건물이 많아 가난한 예술가들이 모여들었다. ‘새롭게, 자유롭게, 그리고 거침없이’는 슬럼화된 이스트빌리지에 모여든 예술가들의 시대감성이다. ‘검은 피카소’ 장미셸 바스키아,키스 해링은 낙서화로 주목받았고, 데이비드 워나로위츠는 행위예술로 이름을 날렸다. 최 작가도 그들과 함께 부대끼며 생활했다. 이제 그는 그 ‘반항의 유목지’에서 배양된 것들로 21세기 현대인의 심리적 강박감을 풀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이런 성과물들이 서울 경리단길에 위치한 갤러리 인터아트채널에서 18일까지 선보인다 기획전 ‘최동열과 이스트빌리지 친구들’을 통해서다. ‘노마딕 라이프 인 뉴욕(Nomadic Life in NY)’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 40년간 작업한 유화, 밀랍, 도자기, 드로잉 등 40여 점을 펼쳐 보인다. 이스트빌리지에서 함께 활동한 크래시, 데이즈, 마샤 쿠퍼, 제임스 롬버거의 작품도 함께 볼 수 있다.

작가는 오늘도 잠에서 깨어나 커피향에 취해 오늘도 그림을 그린다. 그린 그림을 놓고 바라보고 있으면 모든 잡념이 사라진다. 이제사 산사에서 수행하는 스님의 마음을 알 것 만 같다.

 


출처- 뉴스프리존(http://www.newsfreezone.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