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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된 청자, 그 다섯 가지 이야기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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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8 agonies, designed by Alessandro Mendini, Indivisual size_30H x 25 x 20 cm, 2009

Produced by Haegang Institute of Goryeo Celadon

 

 

 

‘디자인이 빚는 청자’_알레산드로 멘디니(Alessandro Mendini)

 

 

108번뇌

 

영혼이라는 허구가 지닌 깊이를 향한

프루스트의 나열

 

더 부드럽고 더 단단하게 더 분명한 형태로

영원을 향한 정지된 느린 움직임

 

 

‘우리의 천성은 시간 밖에 있으며, 영원을 먹고 산다’_마르셀 프루스트

세밀하고 풍부한 오브제들이 나열된 안락하고도 내밀한 공간 속에서 마르셀 프루스트는 의미를 찾기 위해 감각을 사용한다. 시간 속에서 기억을 환기시킬 장치, 의미를 되찾아 줄 감각이 없다면, 프루스트식 시간 속에서 삶은 의미를 회복할 수 없게 된다.

알레산드로 멘디니의 ‘폴트로나 디 프루스트(Poltrona di Proust)’가 담고 있는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삶이 무의미하게 흘러가지 않도록, 의미의 부재를 극복할 수 있도록, 색으로 생의 감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폴트로나 디 프루스트’의 역할이다.

색의 향연으로 덮인 그간의 멘디니의 ‘폴트로나 디 프루스트(Poltrona di Proust)’가 찰나에 생의 의미를 회복시켜주는 환기 장치였듯이, 청자로 만들어진 ‘폴트로나 디 프루스트(Poltrona di Proust)’, ‘108번뇌’ 역시 사적인 생의 의미를 벗어나, 시간 밖을 벗어나 보편성을 띄는 영원을 향해 있는 것이다. 과거의 청자가 영원이라는 것에 의지하고 있듯이, 시공을 초월해 도공의 선반에 놓일만한, 프루스트가 앉아 있을 법한, 허구적이지만 진실한 감각으로 ‘108번뇌’는 영원이라는 것에 의지한다. 삶을, 의미를 되찾을 수 있도록……

고요히 말 없는 상태에서의 ‘108번뇌’는 지나치리만치 프루스트적이다. 마르셀 프루스트가 자신이 가둔 허구적 세계 속에서, 고립과 고통의 삶 속에서 단어를 나열하여 영혼이라는 허구가 지닌 깊이, 삶의 의미를 찾기를 갈망했듯이 ‘108번뇌’는 더 부드럽고 더 단단하게 더 분명한 형태로 영원을 향한 정지된 느린 움직임을 그리듯이 삶의 내면을 나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건 분명히, 우리의 정신세계가 둘러싸인 화병과도 닮은 우리 육체의 존재가 모든 내적 충만함, 과거의 기쁨 그리고 우리의 모든 고통이 영원히 우리의 소유라고 믿게 만든다.’ _마르셀 프루스트

 

‘108번뇌’에서의 고통은 영원히 끊이지 않을 것만 같은 내적 충만함과 과거의 기쁨이 엉킨 허구이며, 고립된 채 각자가 소유하고 있는 허구이며, 이 허구는 가장 의지할만한 감각인지도 모른다.

 

 

분명한 것은 마르셀 프루스트가 허구에서 진실한 삶을 찾아나갔듯이 각자는 허구를 통해 위로를 받으며 의지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문학적 구원이든, 종교적 구원이든……인간은 삶은 고통은 끝 없는 바다처럼 나열되고 있다. 침묵하는 청자가 나열되듯이 말이다.

 

 

 

 

‘색으로 보는 청자’_바이런 킴(Byron Kim)

 

 

탐스럽고 탐욕스러우며 창백한 청자의 색.

 

전부이거나, 아무것도 아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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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ron Kim, Koryo Green Glaze #7, Oil on linen, 213.5 x 152.5 cm, 1996

 

부정할 수 없는 것은 청자를 가득 채우고 있는 것이 색이라는 것이다. 색이 몸이고 색이 전부이다. 이것이 전제되지 않고 청자의 색을 가만히 오래도록 응시하지 않는다면 색은 아무것도 아닌 게 되고 만다.

 

색에 대한 몰입 없이는 청자는 보이지 않는다. 청자의 색은 청자가 내뿜는 숨이자, 고요이며, 기품이며, 위엄이며, 순수이며, 열망이며, 심연이며, 감수성이며, 숭고이며, 시야(視野)이며, 농현(弄絃)이며, 집약이며, 형용사이며, 관념이며, 시적 정취(情趣)이며, 여백이며, 감정이며, 내면이며, 조용한 확신인 것이다.

 

몸체 위로 흐르는 담록청유(淡綠靑釉)는, 감시화천루(感時花濺淚) 시절을 애상히 여겨 꽃도 눈물을 흩뿌린다던 두보의 시정(詩精)과도 맞닿아 있다. 편안할 리 만무한 생애 속에서 어김 없이 무정하게도 봄이 오듯이, 청자는 시야를 흐리게 할 만큼 찬란하게 투명하게 생을 훔친 듯이 아름답게 색을 발하고 있다.

 

시나브로 변화하는 색을 느낄 여지를 남기지도 않은 채 아주 미묘하게 세월의 색을 받아들이면서 시선을 붙잡는 의지적이며 사려 깊은 색으로 청자의 색은 회색의 태토(胎土) 위에 고요히 남는다.

보이지 않는 세계에 존재감을 부여하는 듯한 청자의 순한 색은 여린 듯하지만 강하고, 미동도 하지 않는 듯하지만 맥박이 뛰는, 생명력 있는 변화무쌍한 하늘과 같이 물과 같이 근원적 유리질을, 물질성을 가지고 있다. 

 

색을 얻기 위해 고려인(高麗人)이 생(生)을 걸고 집요하게 색을 열망했듯이, 화가 역시 색을 찾는다. 색은 찾아낼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농익은 감성으로 조금은 다르게 평면으로 옮길 수는 있다. 이것이 이 고려청자유약시리즈이다.

 

형태가 사라진 추상 속에 색채가 단조로이 있는 듯하지만, 그 안에는 색을 향한 열망이 인간이 지닌 시각에 대한 욕망이 탐스럽고 탐욕스러우며 창백하게 청자의 색으로 표현되어 있는 것이다.

전부이거나 아무것도 아니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색은 언제나 남아 있다. 바로 우리의 눈 바로 앞에…

 

 

 

‘기억된 형태로의 청자’_이수경(Yee Sookyung)

 

 

의미 있는 형태, 기억된 형태가 깨어진

틈으로부터 모든 형태가 시작된다. 

새로운 형태의 삶을 꾸는 청자

형태가 취하는 포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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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ee Sookyung, Translated Vase, Ceramic Trash, Epoxy, 24K Gold powder, gold Leaf, 122 × 84 × 81 cm, 2009

 

청자의 형태는 실제 동식물의 구체적 형상과 허구적 동식물이 자연스럽게 구성된 간략하면서도 치밀한 형태를 취하고 있다. 장자의 우화를 들려주는 듯한 청자의 형태는 모든 것에 관심을 보인다. 불교적인 연꽃, 세대로 이어질 부귀영화를 꿈꾸는 물고기와 죽순 그리고 거북이와 석류, 원숭이와 토끼, 동자와 청개구리, 봉황과 새, 사자와 귀면, 아름다움의 상징인 각종 꽃과 식물들, 인간이 꿈꿀 수 있는 지상 최대 권위인 용이 밀도와 깊이 면에서 조화롭게 한 몸을 이룬 청자의 형태는 삶에 위엄을 주기 위해서는 질서를 필요로 한다던 안도 다다오의 말처럼 삶의 이상향과 위엄 사이에서 질서가 실현된 형태의 고전이다.

 

청자의 형태는 형태가 꾸리는 꿈이며, 또 하나의 삶이며, 정화된 꿈의 추출물이며, 생의 열기를 푸른 실내로 옮긴 은밀하고도 포근한 관조적 열람이며, 이상향의 구체적 실체이며, 자연과 동화된 유기체적 형상이며, 엄밀하고 단단한 품성의 단정함이며, 무한한 의미를 증식하는 은유이며, 사실적 허구가 주는 즐거움이며, 소홀함이 없고 디테일이 충만한 형식이며, 꿈으로 회귀하는 생의 토르소이다.

 

‘이곳 사람 가운데 빙하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_할도르 락스네스,『빙하 아래』

 

청자를 빚었던 고려의 도공들 사이에 청자가 우주의 중심이라는 사실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청자는터무니 없을 만큼 중요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무한한 곡선이 이루는 청자의 형태가, 죽순의 잎줄기들이 세밀한 음각선으로 시문되어 오므린 형태가 갖는 그토록 아름답고 정제된 곡률의 형태가, 석류를 안고 있는 원숭이와 줄기들의 형태가, 연못을 통해 보는 듯한 물고기의 비늘과 아가미가 용을 장식하는 형태와, 앙증맞은 작은 토끼가 떠 받치고 있는 향로가, 금방이라도 뛰어 내릴 것 같은 청개구리가 살포시 앉은 손잡이와 포도덩쿨을 부여잡고 탐스런 포도를 탐하거나 연봉우리를 부여잡은 동자를 품은 형태가, 갓 피어나려는 청자연꽃이, 대나무와 학이 시적으로 표현된 정경을 감싸는 매병이, 수양 버들가지가 늘어지고, 오리가 노니는 한가로운 봄 날의 물가 풍경을 감싸는 넉넉한 대접의 형태가 존재할 수 있었겠는가?  세심한 관찰 없이는, 생을 향한 그토록 섬세한 감각 없이는, 완결성을 지닌 그러한 형태는 나올 수 없는 것이다.

 

시각은 언제나 완전한 것을 원한다. 부분 보다는 전체를 원하고, 미완 보다는 완성을 원한다. 마침이 없을 때, 인간은 불안함을 느낀다. 형태의 패턴을 이해한 청자의 도공은 그래서 위대한 것이다. 그렇기에 고려청자의 형태가 우리의 기억을 지배하는 것이다.

 

형태가 지닌 패턴으로서의 형식, 그 형식이 갖는 미적 성취를 이해하지 않는다면 고려 청자는 다만 장식적인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청자의 형태에는 자연의 심연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관찰된 사실적 형태와 이상향이 지닌 허구적 형태의 조화가 겨룸이 없이, 스스로 있는 듯이 있는 것이다. 장자의 소요유편(逍遙遊篇)에서 곤(鯤, 북명의 물고기)이 붕(鵬, 붕새)이 되듯이, 하나의 청자 기형 속에는 물고기와 새의 디테일이 동일한 시공 속에 하나의 형태로 존재한다. 사실과 허구가 청자의 형태에서는 새로운 구체적 현실이 되는 것이다. 장자(莊子)의 언어가 마술처럼 아름답듯이, 사실과 허구의 연금술인 청자의 기형은 관념적으로 아름답다.

자연과 관념에 동시에 도달한 형태가 청자의 형태인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기억해야 할 청자의 의미 있는 형태이다.

 

기억된 형태를 재구성하는 것은 형태가 취하는 포옹인 것이다. 틈이 있는 것 보다 틈을 메운 것이 편안한 감정을 갖게 한다. 동시대의 언어로 고전을 다시 번역하듯이, 소통을 위해 깨어진 형태는 새로운 동시대적 삶을 꿈꾼다.

 

파편을 이어 붙인 형태들은 형태의 기억을 재구성하려고 한다. 적극적으로 그리고 기억에 균열을 만들면서 디테일에 눈을 뜨게 만든다. 잃어버린 혹은 지나쳐 버린 디테일들을 우리가 쉽게 찾아서 인식할 수 있도록 친절하게 구성하여 보이는 것이다. 청자가 지닌 세련된 문양과 청자가 빚은 허구의 동물들의 디테일이 되살아 나도록…… 또한, 깨어진 파편이 재구성되었을 때 새로운 형태로 완결성을 가질 수 있듯이, 트라우마가 삶을 망치지 않는다는 것을, 새로운 삶을 구성할 수 있을 거라는 치유의 희망을 보이는 것이다.

 

형태의 번역은 이렇게 되는 것이다. 디테일을 바라볼 수 있는 섬세한 시각을 요구하고, 치유라는 희망을 요구하여 본래의 고전이 가진 미를 볼 수 있는 시야를 열고 형태에 포옹할 수 있도록 동시대의 언어가 그렇듯이 조금은 거칠게 조금은 노골적으로 반응을 요구하는 것이다.

 

 

 

‘사진에 담긴 청자’_구본창(Bohnchang Koo)

 

 

. . . .다만 패턴과 형식에 의해서만

말이나 음악은 정지에 이른다,

마치 중국자기가 정지된 채 조용히

영원히 움직이듯

_BURNT NORTON (No. 1 of 'Four Quartets') T.S. Eliot

 

정지된 자기가 지닌 깊이감은 물질을 비물질화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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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hnchang Koo, CL 02, C-print, Edition 1 / 7, 154 x 123 cm, 2009

 
 

사진은 때로 의미를 담기 위해 경쟁하거나, 피사체가 지닌 영혼의 시선 혹은 삶 그 자체를 거르지 않고 보이기 위해 노력한다. 있는 자체를 보이려 한다할지라도 사진 안에서의 피사체는 언제나 작가의 의도와 함께 한다.

 

‘나는 삶을 포착하겠다고 살아가는 행위 속에서 삶을 간직하겠다고 마음먹고 숨 막히는 느낌을 맛보며 언제라도 뛰어들 수 있는 채비를 갖추고 거리를 헤매고 다녔다. - 난 평생을 결정적 순간을 카메라로 포착하길 바랐다. 하지만 인생의 모든 순간이 결정적 순간이었다.’_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삶을 포착하겠다던 브레송 역시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시선, 결정적 순간이라는 의미를 담으려 했던 것처럼 본다는 것은, 더욱이 뷰파인더를 거쳐서 본다는 것은 어떠한 방식으로든 의미를 부여하게 마련이다. 작가가 단어를 고르듯이, 화가가 색을 고르듯이, 사진 작가는 구도를 잡기 때문이다. 다만, 사진 작가들의 트리밍에는 허용된 자유가 많은 반면에 또한, 제약이 많이 따른다. 사진의 속성 상 피사체에 절대적으로 의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사진에 있어 피사체는 다른 예술 매체 보다 상대적으로 중요한 것으로 부각될 수 밖에 없다. 피사체에 가할 수 있는 전능한 힘이, 작가가 기대했던 의도가 때로는 허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글이나, 회화에 비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발생하는 아이러니는 피사체가 지닌 모든 것을 전달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사진이란 훌륭한 매체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사진은 희극적으로든 비극적으로든 혹은 중립적으로든 피사체를 담아낼 수 있는 매체로서 적절한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영혼의 시선을 담을 수 있으며, 생의 결정적 순간을 담을 수도 있으며, 회화의 구도 보다 아름다운 일상을 포착할 수도 있으며, 참혹한 현장을 기록할 수 있으며, 굶주린 아이가 지닌 슬픔을 담아낼 수도 있으며, 어느 시간과 공간이 지닌 감정을 담을 수 있으며, 풍경의 나른함을, 정지된 사물의 형태와 색 그리고 분위기를 가장 닮게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때로는 남루한 것마저도 예술적으로 비춰질 수 있게 만드는 힘이 사진에게는 있다. 사진은 피사체가 지닌 아우라를, 트리밍 안에 시각화하여 또 다른 정서로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사진에는 현실을 현실 너머로의 현실로 혹은 현실 그 자체를 강조할 수 있는 힘이 있다. 그것이 사진이 지닌 초현실적인 힘이다.

 

‘나는 항상 초현실적인 사물들에, 베일에 가려졌거나, 혹은 은밀하게 숨겨진 사물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나는 그 사물들을 더 가까이서 보려 했었다. 탈을 쓴 춤꾼들 역시 마찬가지이다. 내가 그들의 존재를 그려내려고 할수록, 나는 탈 안에 감춰진 힘을 더 포착하려고 결심한다.

그들이 카메라 렌즈 앞에 움직임 없이 순진하게 억눌린 채 마주할 때, 나는 그들의 캐릭터들이 드러나고 있음을 보게 되었다. 나는 그들을 숨쉬게 하고, 내 작품 안에서 영원히 살아 있도록 하고 싶다.’_구본창

 

구본창 자신이 서술하듯이 그의 사진이 담고 있는 것은 현실에 기반하고 있지만, 현실 그 너머에 있다. 탈을 쓴 그네들이 갖고 있는 호흡을 포착하여 그것을 사진 안에서 살도록 하고 싶은 것처럼 말이다. 청자를 담아낸 사진 역시 청자라는 사물에 뷰파인더가 있지 않다. 청자라는 자기가 지닌 깊이, 청자라는 자기가 지닌 정서에 뷰파인더는 고정되어 있다. 청자라는 물질이 지닌 초현실적 성질을 표현하기 위해 사진을 찍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사진이라는 예술의 권위가 어디에 있을 것인가? 청자는 이미 존재하는 데, 피사체의 감정을 담을 수 없다면 사진이 차지할 자리는 없는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사진은 청자라는 정지된 자기가 지닌 깊이에, 물질의 비물질화에 기여해야만 하는 것이다. 엘리엇의 시에서처럼 정지된 자기는 이미 정지된 채 조용히 영원히 움직이고 있기에 사진이 담아낼 청자는 결국 청자의 비물질적 이미지, 관념적 이미지인 것이다.

 

그의 사진 속에서 청자가 정지된 채 숨쉬고, 영원히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삶과 조우하는 청자’_海剛 유광열(Yoo Kwang Yul), 이윤신(Yi Yoonsh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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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ed by Yi Yoonshin, Produced by Yoo Kwang Yul(Haegang Institute of Goryeo Celadon), 2005

 

 

도자는 삶이 지닌 설명이며, 삶이 지닌 결핍이거나 열망이며, 관념적 포만감이다.

 

삶과 조우하는 청자는 관념적 포만감을 향해 있다. 삶과 조우하는 청자는 형식을 위한 형식이 아니라, 일상의 소소함을 즐기는 느린 삶의 계획으로서의 형식이다.

 

격조를 부여하는 것, 품위를 부여하는 것, 정성을 부여하는 것, 존중을 부여하는 것, 감각을 여는 것, 색을 부여하는 것, 정취를 부여하는 것, 형식을 부여하는 것, 느림을 부여하는 것, 빈 공간을 부여하는 것, 쉼을 부여하는 것, 삶의 공허를 채워주는 것, 성찰을 부여하는 것, 포용을 부여하는 것이 청자 그릇으로는 가능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것은 편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의 삶을 묘사해줄 도자이다.

 

_글 인터아트채널 이지연